에로티시즘(Eroticism) 문학의 거장 마광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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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이엠아티스트 댓글 0건 조회 683회 작성일 22-09-06 10:27본문
한 때 천재적인 문학적 자질과 재능을 가졌던 불운의 학자, 마광수 교수!
그는 청록파 시인이었던 박두진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했던 시인이자 소설가였습니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마광수 교수는 한 때 촉망 받던 문인이었으나 '즐거운 사라'를 펴내면서 인생의 역경이 시작되는 불운을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급기야 이 소설이 음란물로 지정되면서 그는 국내 문단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고 학자로서 왕따를 당하고 탄압을 받는 등 온갖 수모와 멸시를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천재적 발상과 작가적 실험정신이 뛰어났던 마광수 교수의 작품들이 국내에서 사회적 논란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요인은 바로 그가 추구했던 에로티시즘 미학에 대한 반정서적 편견과 인식에 대한 저항의식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인으로서 문학활동을 시작했으나 소설 '권태' 출판 이후 에로티시즘의 미의식과 예찬이 짙은 탐미적
작품들을 선보이며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국내 에로티시즘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얻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마광수 교수는 '즐거운 사라', '자궁 속으로', '귀족', '불안', '발랄한 라라', '사랑의 학교', '가자 장미여관으로' '야하다 얄라숑',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등의 에로티시즘 미학이 담긴 소설, 시집, 수필집을 일관성 있게 창작했습니다.
하지만 섹슈얼리티(Sexuality)를 기반으로 한 그만의 탐미적 미의식은 국내 평단에서 철저히 외면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교수직에서 해임이 되고 음란물 생산자로 낙인이 찍혀 실형을 선고 받는 등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운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마광수 교수는 국내 문단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끝내 자살로 삶을 마감했던 문학 장르의 실험가였으며 폐쇄적인 문학계의 보수성을 넘어선 혁신가였습니다. 에로티시즘 문학에 있어 영국에 D. H. Lawrence(로렌스)가 있다면 우라나라에는 마광수 교수가 있습니다. 로렌스에 비견될만큼 그는 문학적 혁파와 도전에 뛰어난 작가적 정신을 가졌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성적(性的) 본질을 일차원적인 육체적 한계에서 탈피시켜 에로티시즘의 문학적 미의식을 숭고함으로까지 끌어올리려 했던 개성있는 작가였습니다. 시대를 앞서갔던 천재나 위인은 언제나 외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마광수 교수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로 삶을 마감한 그였지만 일각에서는 그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자 집단적 '왕따'라고 안타까워 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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